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방인(소설)/번역 논란 (문단 편집) == 정리 == 이정서는 자신이 느낀 '진짜(?)' 「이방인」을 알리려는 마음이 그만큼 절박했기에 마케팅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문단 권력에 저항하고, 기존의 성과를 성역으로 여기지 않으며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건 문학과 번역, 독자를 위해서 정말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는 스스로가 내세우는 결과물이 제대로 된 물건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마케팅 과정에서의 각종 잡음과 불화, 이런저런 진영 논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우선 이정서의 번역 결과물 그 자체부터 문제가 많다.''' 그 자신도 인정하였듯, 애초에 그는 불어 전공자가 아니다. 물론 해당 언어 비전공자가 중역 등을 통해서 훌륭한 번역물을 내놓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그가 처음에 그토록 도발적이고도 기세 좋게 기존의 번역판들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게 무색하게도, 그의 번역은 차라리 초라할 지경.[* [[http://indindi.egloos.com/8983831|불어의 문법이나 시제, 관용적 표현에 익숙지 않아 이를 제대로 옮기지 못했음은 물론]], [[http://indindi.egloos.com/9447117|간단한 접속사도 몰라 이를 번역에 반영하지 않았으며]], [[http://indindi.egloos.com/9166544|외국어를 배울 때 제일 처음 배우는 인칭대명사마저 헷갈려한다]]. [[http://indindi.egloos.com/9053416|'세계의 무관심'이라는, 「이방인」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 의식을 담고 있는 문장조차 제대로 옮기지 못했다.]] '평영'과 '배영'을 '발차기를 했다'와 '몸을 뉘었다'(…)로 옮긴 건 차라리 애교.] 결국 거창한 포부와는 달리, 그저 그런 빈약한 번역본 하나를 더 추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세계 최고 수준의 프랑스 카뮈 연구회도 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냥 기존의 번역판들보다 '''훨씬 심각한 오역'''을 하고 만 셈. 문학이 제아무리 해석의 자유를 지닌다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내적 논리와 정합성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정서는 기초적인 원문 해독조차 못 하는 수준. 애초에 참신한 해석을 해내는 게 무리다. 거기다 자신의 그 정상적인(?) 해석에 대한 근거를 대 보라고 하면 "내 느낌이 그렇다", "내가 읽으니 그렇더라", "당연히 이게 자연스럽지 않느냐", "카뮈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류의 허약한 근거만을 내세운다는 게 문제.[* 사실 그의 역본 자체가 매 쇄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그냥 불어 번역을 못 하니 계속 찔끔찔끔 수정하고 있는 것.]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핍박받고 있는, 선량하고 양심적인 약자' 프레임에 갇혀(or 프레임을 만들어) 스스로의 억지 주장을 강변하고 있다. '김윤식의 표절을 용기 있게 지적한 이명원'과 '김화영의 오역을 용기 있게 지적한 자기 자신 이정서(이대식)'를 동일선상에 놓고 싶은 모양이지만, 전자는 바른 말을 했으나 후자는 시답잖은(…)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차이를 간과하고 있다.[* 이하는 정황 근거이지만, 김윤식의 표절을 지적한 이명원을 다룬 소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는 2001년에 이미 출간된 책임에도, 이정서가 자신의 「이방인」을 출간하는 시점에서 이 책 역시 굳이 은근슬쩍 재출간시킨 점 역시 의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결국 '부당한 권위에 저항하는 양식 있는 약자' 프레임을 성립시키기 위한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 [[http://blog.aladin.co.kr/mramor/6975946|참고]] ~~이명원과 자신은 애초에 다른 경우라는 걸 이제는 깨칠 때도 됐는데~~ ~~후배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나~~] 물론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애초에 김화영의 번역에 '오역'이라는 낙인을 찍기도 어렵다는 게 (진보적 인사들의 평을 포함한) 중론. 그가 '기둥서방설, 정당방위설' 등을 밀었던 걸 보면, '말이 되는, 개연성이 있는 소설'에 집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화영의 난해한 번역과 오역이 참된(?) 「이방인」 이해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심오하고 철학적인 우화로서의 카뮈 문학을 통속적인 삼류 치정물(…)로 바꿔 놓고야 말았다. 이정서의 이해가 맞다면, 카뮈가 이 작품을 통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도리어 신기해질 지경. ~~당신이 이해 안 간다고 해서 말이 안 되는 게 아니에요~~[* 해당 논쟁의 와중에, 정작 프랑스인들 역시 「이방인」의 줄거리를 기존에 한국인들이 이해했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음이 밝혀졌다(프랑스 공영라디오 방송 France Culture의 2012년 10월 21일 방송분). "(김화영을 필두로 한) 오역이 본래 뜻을 가리고 이해를 망쳤다"라는 이정서의 주장이 무색해지는 지점.][* [[파일:dAlbyAg.png]] 「이방인」에 대한 이정서의 명백히 잘못된 이해가 어떤 원인, 어떤 얼개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잘 꼬집은 'indifference'의 댓글. 요컨대 이야기 구조와 전개에 있어서의 의도된 부조리함을 통해 오히려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억지로 '조리 있게' 만들려 한다는 것이 이정서의 번역, 더 나아가 그의 「이방인」 이해의 문제점이다. [[http://indindi.egloos.com/m/comment/7134167|출처]]] 그럼에도 끝까지 "나만이 카뮈의 「이방인」을 온전히 이해했다"며 절대번역론을 내세우는가 하면, 그 근거라고 내세우는 게 카뮈와의 접신(…) 정도이니 말 다 한 셈. 그가 카뮈의 다른 작품이나, 그 문학 세계를 다룬 논문 한 편이라도 읽어봤을지 의심스럽다. 이 해프닝에 대한 총평은 [[http://gonghyun.tistory.com/1117|이 링크]]를 참고하자. 위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지켜보며 팝콘만 먹~~은 제3자가 정리한 글이다.[* 사실 댓글 몇 마디 정도는 달았던 듯. [[http://saeumbook.tistory.com/440|링크]]의 댓글창에 저 티스토리 주인장 분의 닉네임이 보인다. 다만 적극적으로 어느 한쪽의 의견을 개진하기보다는, 일단 한발 물러나서 사태를 지켜보다가 후에 위 총평과 같은 결론을 내린 듯하다.] 한편 「이방인」의 각종 역본을 연구한 논문도 나왔는데, 이정서의 역본 역시 다루고 있다. [[http://french.snu.ac.kr/node/7|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김진하 교수]][* [[세계문학전집(을유문화사)]]의 이방인 번역을 맡았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한국어 번역본들에 대한 문체론적 고찰」'''.[*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의 [[http://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970945|해당 페이지]]에서 논문 전문 pdf를 볼 수 있다. 바쁜 사람은 논문 36페이지의 "Ⅴ. 번역본들의 특징 - 2.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부터 훑어보자.] 이정서의 「이방인」이해와 번역에 대해 이 논문에서 내린 총평은 > 요컨대, 소설 작품에 대한 몰이해는 새로운 소설쓰기가 되어 버림을 이정서의 독법은 보여주고 있다. 이다. 호평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평가다. 사실 저 정도는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고, 논문 본문에서는 > 이정서의 번역에서는 작은 부분에서도 단어나 문법에 대한 오해나 문체상의 부적절함이 쉽게 발견된다. >더욱이 이정서는 비단 김화영의 번역뿐만 아니라 이기언과 김예령의 번역본도 더불어 비판했는데, 그가 내세운 번역의 실상을 보면, 이들 번역본들의 비교를 통해서 새로운 번역을 조합해냈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들이 많다. >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에서 드러나는 많은 오류들은 대개가 그 자신이 내세운 원칙에 위배되는 것들이다. 그리고 어쩌다 독자적인 번역을 시도하는 대목에서는 일반 독자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수업에서 『이방인』을 강독할 때 번역의 예로 참고하기에 민망한 어법들이 나온다. >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정서의 『이방인』 번역에서뿐만 아니라 기존 번역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드러낸 독단과 자기현시욕, 그리고 작품에 대한 몰이해가 대중과 프랑스어 학습자들을 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 이정서는 작품에 대한 과도한 애정으로 말미암아 작품을 자기 나름으로 재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데, 그런 시각이 작품을 얼마나 자기만의 견해로 오해하게 만드는지는 (후략) > (이정서의) 이 부분의 오독과 억지 해석에 대해서는 차마 언급하기 민망하다. …와 같이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이방인(소설),version=11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